서 론
이 논문의 목적은 1972~1973년 박정희 정부의 영림공사 설립과 폐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이라는 산림정책 전환의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1972년 박정희 정부가 1년간 논의 끝에 산림개발의 주체로 설정한 영림공사는 당시 산림 황폐화와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라는 산림 문제를 해결하여 산에서 소득이 나오는 산지경제권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이었다. 논의만 된 것이 아니라 법, 제도, 예산, 조직 등이 마련되었다.
「산림개발법(1972.12.30.)」을 제정하여 대규모 특수개발지역의 산림을 경영하는 조직으로 영림공사를 설립하고, 영림공사 설립에 들어가는 자본금 200억 원을 정부가 전액 출자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산림개발법」의 핵심은 특수개발지역 내 사유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고, 조림을 할 수 없는 산림 소유자(산주) 대신 영림공사가 강제로 조림을 대집행하고 미래의 발생 수익을 산주와 나누는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조림과 산림경영을 시행하는 자에게 장기⋅저리의 융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산림개발기금을 설치하고 융자금 지원을 위해 필요한 입목의 저당권을 보장하는 「입목에 관한 법률(1973.2.6.)」을 제정했다. 예산의 범위 안에서 산림개발기금을 조성하도록 정해졌는데, 제도 설계 초기에는 200억 원 규모를 고려하였다(The Chosun Ilbo, June 2, 1972). 당시 영림공사 설립과 산림개발기금 마련을 위해 경부고속도로 건설비 429억 원(National Archives of Korea, 2026)에 준하는 국가 재정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또한, 장기적으로 임업의 위험 요인인 산불 피해 등을 예방하기 위해 개발사업 시행자에게 산림재해보험 가입을 의무화했다.
1973년 2월 15일 영림공사가 발족한다는 기사(The Maeil Business Newspaper, February 2, 1973)가 나올 정도로 영림공사 설립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같은 해 2월 23일 비상국무회의에서 돌연 영림공사의 폐지와 농림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이 결정되었다(The Dong-A Ilbo, February 23, 1973; National Archives of Korea, 1973). 이에 따라 3월 3일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여 산림청은 내무부로 이관되었고 3월 5일 「산림개발법」을 개정하여 영림공사 관련 27개 조항 전체가 삭제되었다. 곧이어 3월 10일 대한민국 산림정책의 전환점이라 평가받고 있는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1973~1982)(제1차 계획)이 내무부 치안국 강당에서 공식 발표되었다(NFCF, 1973). 이 모든 결정은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선언 이후 만들어진 비상국무회의에서 내려졌다.
박정희 정부는 어떤 이유로 영림공사를 설립하려 했고 어떤 까닭으로 폐지하였는가? 영림공사의 폐지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은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에 큰 틀에서 답한 선행 연구가 있다(Bae, 2007). 요약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영림공사 설립에 들어가는 재정적 제약과 10년 안에 산림녹화를 달성하려는 시간적 제약으로 영림공사 설립 계획을 백지화하고 내무부 행정력 중심의 치산녹화사업을 추진하려 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산림정책의 변화를 경영중심에서 행정중심으로 전환했다고 주장했다. 선행 연구는 제1차 계획에 초점을 두고 영림공사를 부차적으로 다루었으나, 이 논문은 영림공사에 중점을 두고 제1차 계획과의 관련성을 다룰 것이다. 특히, 당시 신문과 비상국무회의 자료 등을 발굴하여 선행 연구에서 다루지 못했던 1972년의 영림공사 설립 과정과 그 과정에서 수행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영림공사 설립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까지 우리나라 임업의 가장 큰 장애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를 가장 혁신적으로 다룬 정책 사례이기 때문이다. 즉, 규모의 경제에 큰 영향을 받는 임업의 장애 요인인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일정 규모의 특수개발지역 내 사유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여 산주의 의사와 관계없이 경영권을 영림공사로 이전하고 장래 발생하는 산물 수익을 산주와 영림공사가 나누도록 제도를 설계하였다. 사유림 경영권의 강제 이전이 산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위헌 주장과 황폐한 산림을 녹화하고 산지의 효율적 이용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주장이 대립하였던 정책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인식한 산림 문제 가운데 황폐한 산림은 산림정책 전환으로 수행된 산림녹화 프로그램(1973~1987)으로 빠르게 녹화되었다. 반면, 영림공사 설립으로 해결하려 했던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는 영림공사 폐지 이후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1970년대 영림공사 설립 과정에서 고민했던 정책 대안들과 영림공사를 폐지하게 된 원인을 이해하는 것은 현재 당면한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와 경쟁력 있는 임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대안을 찾는 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연구 방법
박정희 정부가 결정한 영림공사의 설립과 폐지, 연이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과 제1차 계획의 수립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분석 틀로 매틀랜드의 모호성-갈등 모형을 이용하였다(Mathland, 1995). 매틀랜드는 정책 권고가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조건을 식별하는 데 기존의 이론적 연구가 실패해 왔다고 보았다. 즉, 정책의 특성에 맞게 집행되어야 정책의 효과가 발생하는데, 기존의 연구는 정책을 식별하는 조건을 확인하지 않은 채 모순된 정책 권고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주장이다. 매틀랜드는 정책의 모호성과 정책 집행자와 행위자 간 갈등의 높고 낮음에 따라 집행 과정이 달라진다고 보았다. 정책의 모호성은 정책 목표와 수단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고 갈등은 정책의 목표와 수단을 둘러싼 정책 집행자와 행위자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규정했다. 매틀랜드는 정책의 모호성과 정책에 대한 갈등의 높고 낮음으로 구분된 4개의 행렬에 맞는 집행 과정의 유형, 해당 유형의 집행 결과를 결정하는 핵심 원리, 그 범주에 해당하는 정책 사례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Figure 1).
첫 번째 유형은 낮은 정책 모호성과 낮은 정책 갈등의 행정적 집행(administrative implementation)이다. 정책의 목표도 명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 수단 역시 명확하여 정책의 모호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이를 둘러싼 정책 집행자와 행위자 사이의 갈등도 낮은 유형이다. 의사결정 이론에서 모호성과 갈등이 낮은 선택 상황은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Simon(1960)은 이러한 유형의 결정을 프로그램화된 결정(programmed decision)이라 불렀다. 행정적 집행의 핵심 원리는 집행 결과가 자원(resources)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천연두 박멸 프로그램처럼 충분한 자원이 해당 프로그램에 배정된다면, 바람직한 결과는 거의 확실하게 달성되는 유형이다.
두 번째 유형은 낮은 정책 모호성과 높은 정책 갈등의 정치적 집행(political implementation)이다. 행위자들은 명확하게 규정된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표들이 서로 양립이 불가능하여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하며, 수단을 둘러싸고도 격렬한 갈등이 벌어질 수 있다. 정치적 집행에서의 핵심 원리는 집행 결과가 권력(power)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통학버스(Busing) 강제 이용으로 주거지 분리와 인종 차별을 완화하고 학교 통합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은 높은 갈등을 수반하지만, 모호성이 낮은 대표적 사례이다. 중앙정부와 법원의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정책은 집행되었다.
세 번째 유형은 높은 정책 모호성과 낮은 정책 갈등의 실험적 집행(experimental implementation)이다. 정의상 실험적 집행은 선호가 문제이며, 기술이 불확실한 사례를 의미한다. 이런 유형의 정책 집행 결과는 주로 어떤 행위자들이 실제로 참여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관여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유형을 이끄는 핵심 원리는 맥락적 조건(contextual conditions)이 과정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취학 전 교육 프로그램인 헤드스타트(Headstart)가 실험적 집행의 대표적 사례이다. 3개월이라는 단기간 내에 추진된 헤드스타트는 프로그램의 목표조차 명확하지 않고 일반적인 인식에 머물렀음에도 적극적인 제안자의 다양한 제안서가 축적됨에 따라 프로그램이 점차 구조화되었다.
네 번째 유형은 높은 정책 모호성과 높은 정책 갈등의 상징적 집행(symbolic implementation)이다. 이 유형의 핵심 원리는 지역에서의 연합 역량(coalition strength)이 집행 결과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정책의 진로는 가용 자원을 통제하는 현장 행위자들의 연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빈곤과의 전쟁’의 일환으로 설립된 지역사회행동기관(Community Action Agencies: CAA)은 상징적 집행의 대표적 사례이다. CAA의 명시적 목표는 지역 주민의 권한 강화를 촉진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거의 모든 참여자에게 불분명했다. 이러한 큰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CAA는 상당한 논쟁과 갈등을 일으켰는데, 이는 모호한 정책이 초래하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매틀랜드의 정책 집행의 모호성-갈등 행렬 모형을 이용하여 박정희 정부의 영림공사 폐지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을 바라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석 틀이 정책 집행의 유형에 따른 정책 전환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왜 이런 전환이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당시 신문 기사, 정책 문서 등을 찾아 산림정책의 전환 이유를 파악하는 맥락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결 과
먼저 영림공사 설립 논의가 시작되는 1972년의 직전 해인 1971년의 산림과 임업의 현황을 살펴보자(Forestry Administration of Korea, 1973). 산림면적은 667만 ha로, 국토 면적의 약 67%를 차지했다. 소유별 산림면적 비율을 보면, 국유림 19.4%, 공유림 7.4%, 사유림 73.2%였다. 이중 무립목지는 산림면적의 12.5%(832,525 ha)를 차지하였고, 특히 사방사업이 필요한 산지 86,007 ha가 포함되었다. 총 임목축적은 7,077만 m3, ha당 임목축적은 10.6 m3였다. 소유별 임목축적 구성 비율을 보면 국유림 49.9%, 공유림 7.4%, 사유림 42.7%였다. 국유림의 ha당 임목축적(27.2 m3)은 사유림(6.2 m3)보다 4.4배나 높았다. 사유림 소유구조를 보면, 176만 명의 산주 가운데 소재산주는 84.4%, 부재산주는 15.6%였다. 1 ha 미만의 산주가 56%, 1~5 ha 미만의 산주가 32%, 어느 정도 규모의 경제가 가능한 10 ha 이상의 산주 수는 4.3%에 불과했다. 당시 산림의 대부분은 사유림이었으며, 국유림과 비교하여 빈약한 산림자원을 보유한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 아래에서 황폐한 사유림을 녹화하는 것이 당시 정부가 직면한 핵심 산림 문제였다.
1971년 국민총생산은 1조 5,618억 원이었는데, 임업은 1.4%인 221억 원을 생산했다. 원목 소비량은 총 478만 m3로, 국산 원목의 비율은 21.6%였다. 국산 원목 공급량은 총 임목축적의 1.5%를 차지하였다. 당시 입목의 경급이 작아 조재율을 가슴높이지름(DBH) 20 cm 미만인 0.8로 가정(Son et al., 2016)하여 원목을 입목으로 환산하면 당시 원목 생산량은 총 임목축적의 1.8%에 해당한다. 국산 원목 공급량의 45%는 석탄 광산 등에 쓰이는 갱목이었고, 이어 일반용재가 29%, 펄프용재가 26%를 차지하였다. 수입 목재의 76%는 합판용재가 차지하였다. 당시 국토의 67%를 차지하는 산림이 있음에도 국내 목재 소비량의 78.4%를 수입하는 데 1억 6,189만 불의 외화를 사용하는 목재 수입은 수출제일주의(Oh, 2010)를 내세운 박정희 정부에게는 심각한 산림 문제로 인식되었다.
다음으로 영림공사를 설립하게 된 배경과 과정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월 31일부터 2월 7일까지 지방연두순시를 수행하였다. 2월 8일 대통령의 지방연두순시를 수행한 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 구태회는 기자들을 만나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당 차원에서 지원하기 위한 대책의 일단을 밝혔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산림녹화와 경제림 조성’(The Maeil Business Newspaper, February 9, 1972)의 추진으로, 특히 유휴 산지의 경제림 조성에 방점이 두어졌다(The Kyunghyang Shinmun, February 9, 1972). 당시 여당은 산주가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지 못하는 이유를 임업의 낮은 경제성과 산림개발에 관심이 없는 부재산주에 있다고 보았다. 구태회가 제시한 구체적 대안은 세 가지였다(The Chosun Ilbo, February 9, 1972). 첫째는 경제력이 부족한 농민이 조림에 투자하지 못하니 상속세를 면제하는 등 세제 혜택을 주어 도시 자본을 유치하는 것이다. 둘째는 국내 시장에서 소비되는 원목을 수입하는 업자들에게 그 이익의 일정 부분을 조림사업에 강제 투자케 하는 방안이다. 셋째는 부재산주의 산림을 조림사업의 실수요자가 쓸 수 있도록 하는 반 강제적 혜택과 이익 분배 방안이다. 구태회는 이런 방안을 담는 가칭 산림조성법을 제정(The Maeil Business Newspaper, February 9, 1972)하고 관련 법률을 개정할 수 있도록 관계 부처와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세 가지 대안 모두 이후 「산림개발법」과 「산림개발법시행령」에 포함된다.
1972년 3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청와대-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강봉수 산림청장은 「산지개발법안」을 보고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종합적인 산지개발을 위해 당과 협의하여 완벽한 법안을 만들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The Maeil Business Newspaper, March 31, 1972). 박 대통령의 지방연두순시 지시사항이 「산지개발법안」의 제정으로 구체화되었고, 대통령 지시사항의 이행 부처는 산림청으로 정리되었다. 당시 연석회의에서 보고된 산림청의 법률안과 구체적인 논의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박대통령은 그동안 정부의 산림행정이 일관성이 없어 많은 차질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는 기사(The Maeil Business Newspaper, March 31, 1972)에서 대통령의 산림청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6월 2일 조선일보 김대중 기자는 ‘「보호」에서 「경영」으로’라는 칼럼을 썼다. 이 칼럼은 「산림개혁」이라 불리는 산림 관계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과 진행 상황을 자세히 다루었다. 당정이 합의하여 6월에 국회 제출을 목표로 추진 중인 「산림개발법안」의 핵심은 영세 사유림 소유구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고 산주에게 1년 이내에 조림의무를 부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만약 일반개발지역의 산주가 조림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산림청장은 산주의 의사와 관계없이 산림계, 산림조합, 법인(공단) 등에게 조림의 대집행을 명령하고, 산주와 수익을 강제적으로 분배하도록 했다. 또한 용재림 생산을 목표로 하는 5만 정보 이상의 특수개발지역은 국가가 설립한 공단이 산주 의사와 관계없이 경영권을 갖도록 규정했다. 당시 정부와 여당은 산림녹화의 주체로 ①조림을 수행할 수 있는 산주, ②일반개발지역은 산림계, ③특수개발지역은 국가가 설립할 공단이 맡도록 설계했다. 다음으로 정부가 출자하는 공단(200억 원) 설립을 「산림개발법안」에 담고 임업 투자자에게 장기저리로 융자금을 지원하는 산림개발금고(200억 원)의 설치를 골자로 하는 「산림개발금고법안」을 제정하려 했다. 더불어 조림 투자자가 안정적으로 융자를 받기 위해 조림한 나무를 담보로 저당권을 설정할 수 있는 「입목담보법안」을 함께 제정할 계획이었다. 관련 3개 법안은 예산 당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산림청이 아닌 공화당의 한병기 의원이 주도하여 의원입법으로 추진하였다. 한병기 의원이 관련 법안 발의를 주도하게 된 이유는 한 의원이 1971년 10월부터 국회 농림위에서 임정연구회를 만들어 산림개발 문제를 연구하였던 앞선 활동과 지난 3월 대통령이 산림청장에게 “당과 협의하여 완벽한 법안을 만들어 보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산림개발 관련 법안에 대해 “산림개발의 초점은 이들 소규모 임야를 대단위화하여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고, 여기에 자금을 지원하는 두 가지 측면으로 집약”할 수 있고, “사유재산 침해의 위험성을 무릅쓴 강력한 개발 조처와 개발금융 지원을 병행한 2원적 구조”라 평가했다. 산주의 의사와 관계없이 대집행과 수익 분배 계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된다는 점에서 당시 헌법 제20조,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를 침해할 위헌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 산림개발법을 제안한 관계자는 “이렇게 강제적인 성격을 띠지 않는 한 산림개발은 요원한 일”이라고 인식하였고, 헌법 제114조, “국가는 농지와 산지의 효율적 이용을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에 관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를 들어 위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1972년 6월 29일 청와대-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한병기 의원이 제안한 「산림개발법안」과 부수법인 「입목저당법안」을 원안대로 채택하였다(The Dong-A Ilbo, June 30, 1972).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는 지금 산림정책의 일대 혁신을 강구해야 할 시점에 처해 있다”고 말하고 “①관계 부처는 산림개발법안의 취지에 따라 우선 연차적으로 몇 군데의 시범적인 조림사업을 이룩하여 일반인에게 조림사업이 수익성이 높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식시키고 ②공무원의 퇴직금 일부를 조림사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제도적인 방안과 임야에 대한 일반의 투자요건 조성 방안 등 조림을 기업화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안을 구체적으로 연구 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The Chosun Ilbo, June 30, 1972). 최종적으로 제정된 「산림개발법」에 ①의 ‘시범조림’과 ②의 ‘조림을 기업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영림공사를 설립하여 시범 조림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입법화되었다. 공무원 퇴직금을 이용한 조림 사업 투자는 반영되지 않고 정부 출자금으로 영림공사를 설립하고 산림개발기금을 설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972년 7월 11일 농림부 장관 김보현은 ①국회에 계류중인 「산림개발법안」(의원입법), 「산림개발금고법안」(의원입법), 「산지개발촉진법안」(농림부)을 「산림개발법안」으로 병합하여 정기국회에 제출하고 ②조림을 전담하는 영림공사를 설립할 계획이며, ③조림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21개 표준 수종2) 을 선정하였다고 말했다(The Kyunghyang Shinmun, July 11, 1972). 이로부터 정부가 산림개발 관련 법률의 중복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단일안을 만들고 대규모 조림을 전담하는 조직을 영림공사로 확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2년 8월, 1973년 새해 재정투융자 2,155억 원이 확정되었고 그 안에 주요 정책사업으로 영림공사 출자금 5억 원이 포함되었다(The Dong-A Ilbo, August 23, 1972). 아직 법률이 통과되지 않았음에도 예산이 미리 확정됨에 따라 산림개발법의 제정과 영림공사 설립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The Maeil Business Newspaper, August 25, 1972). 산림청은 1972년 10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산림개발법안」을 사전 보고하고 10월 16일 「산림개발법안3)」의 연내 입법을 전제로 미개발 사유 산지에 대해 ①앞으로 설립될 영림공사가 모범특수개발 2개 지역 4천 정보(국공유림 포함), ②산림계가 일반개발 14개 지역 58,300정보를 대행 조림한다는 방침을 세웠다(The Maeil Business Newspaper, October 16, 1972). 지난 6월 대통령의 시범조림 추진 지시를 반영하여 영림공사가 2개 특수개발지역에서 모범 조림을 추진하고 산림계가 추진하는 일반개발지역 14개도 사전에 구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목할 점은 모범 특수개발지역에 모든 소유 산림이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영림공사의 업무 범위가 사유림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의 모든 산림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2~1973년은 한국 정치사뿐만 아니라 산림정책사 측면에서도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다.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 이후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 활동이 중단되는 비상시국하에서 1972년 10월 17일부터 1973년 3월 11일까지 약 5개월간 국회가 아닌 비상국무회의에서 법이 제정되었다. 정책형성 과정에서 국회의 역할은 사라졌고, 이후 산림개발 관련 법률은 모두 국회가 아닌 비상국무회의에서 결정되었다.
1972년 11월 6일 강봉수 산림청장은 더욱 구체적인 산림정책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①특수개발지역의 시범, 대량 조림을 전담할 영림공사 신설, ②200억 원 규모의 임업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첫 사업으로 내년 안에 5억 원의 재원 확보, ③조림자에게는 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록세 등을 면제하고 묘목대와 비료대를 국가가 보조하여 조림 의욕 제고, ④장기수 위주의 조림에서 속성수와 유실수 위주의 조림으로 전환, ⑤경사 25도 이하의 상대임지는 농경지, 과수원, 목초지 등으로 개간하여 1976년까지 17만 6천 정보의 임지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The Dong-A Ilbo, November 6, 1972). 이 계획은 조림 시행자에게 세제 혜택을 강화하고 조림 정책도 장기수에서 단기에 소득이 창출되는 유실수와 민둥산을 빠르게 녹화할 수 있는 속성수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특히 산지를 경사도 25도로 구분하여 25도 이하의 상대임지를 농지, 과수지, 목초지로 전용하는 산지이용 정책이 추가되었다. 즉, 빠른 산림녹화와 조림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속성수와 유실수 위주의 조림정책으로 전환하고 국토개발 차원에서 임업의 경제성에서 산지의 경제성으로 폭을 넓히는 정책 대안이 제시되었다. 정부는 1970년에 전국을 대상으로 간이 산지이용구분조사(Forestry Administration of Korea, 1970)4) 를 완료하여, 절대임지와 상대임지를 구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결국 1972년 12월 22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산림개발법」 제정을 의결하고, 같은 해 12월 30일 제정하였다. 「산림개발법」의 제정 목적은 “산림개발의 획기적인 계기를 조성하여 임산자원의 비약적인 증강을 도모”하는 데 두었다. ‘산림개발의 획기적인 계기’, ‘임산자원의 비약적 증강’의 목표가 어느 정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유림 경영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이를 위해 ①산림개발지역의 지정과 그 지역에서의 사무 집행, ②산림개발의 선도적 역할을 맡게 될 영림공사의 설립⋅운영, ③산림개발기금에 의한 장기저리의 융자, ④산주 등에 대한 조림상의 규제, ⑤기타 산림개발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정하고, 「산림개발법」의 핵심을 10개 항목으로 요약했다(Korean Law Information Center, 1973).
먼저, 전국의 산림을 용재림개발권, 풍치림개발권, 농용림개발권으로 구분하여 10년마다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산림청장은 산지이용구분조사를 수행하여 산림으로 유지할 절대임지와 다른 용도로 이용할 상대임지로 구분할 계획이었다. 절대임지는 임업의 용도로 사용하는 용재림개발권과 고속도로변, 공원, 명승지, 도시주변 녹지 등 풍치와 국민 보건 향상을 위한 풍치림개발권으로 구분한다. 상대임지는 장기적으로 농지, 과수지, 초지 등으로 사용할 농용림개발권으로 지정한다. 개발지역을 지정할 때는 조림지, 농경지, 사방지, 초지 등의 용도를 정하여 일정한 사항을 고시하고 산주에게 통지하도록 하였다. 3대 개발권 지정과 종합개발계획은 신설될 산림개발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되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산주로 하여금 효율적으로 산림을 개발하게 할 필요가 있는 지역을 일반개발지역으로, 기술적⋅경제적 능력을 갖춘 자로 하여금 장기간에 걸쳐 대단지로 산림을 개발하게 할 필요가 있는 지역의 산림을 특수개발지역으로 지정하도록 규정했다. 일반개발지역은 산주에게 개발의 의무를 지우되 이를 이행하지 아니할 때는 산림계, 산림조합 기타 능력 있는 자에게 대집행하게 하고 대집행 후 6월 내에 비용변상이 없을 때는 산물분수계약이 체결되고 지상권이 설정된 것으로 정하였다. 즉. 사유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여 조림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산주의 경영권을 산림계와 영림공사로 이전하여 강제적으로 대집행과 산물분수계약을 체결하는 제도였다.
특수개발지역의 경영권자는 영림공사 또는 일정한 기준에 적합한 기술적⋅경제적 능력을 갖춘 자로서 산림청장의 지정을 받은 자에 한하도록 하였다. 정부는 특수개발지역의 개발사업을 효율적, 시범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200억 원을 전액 출자하여 영림공사를 설립하였다. 영림공사가 경영하는 산림에 조림 투자자가 있을 때는 투자액에 사업비의 일부를 보조하여 조림하고 투자액에 보조액을 가산한 액면금액과 조림지, 조림량, 수확기의 산물 배당 등을 기재한 조림증서를 발급하도록 하였다.
영림공사의 성패는 다른 사업과 비교하여 투자 대비 수익이 발생할 수 있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특히 초기 비용이 많이 들지만, 수익은 20~30년 뒤에나 발생하는 용재림 경영의 특성상 초기 적자는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영림공사의 업무는 단순히 특수개발지역에서의 사유림 경영을 수행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산림의 매수와 경영, 양여 또는 대부받은 국유림의 경영,5) 묘목 및 임산물 생산⋅가공⋅처분, 임업자재 및 가공시설재의 수입과 임산물 및 가공산물 수출, 정부 위촉 사업 등 매우 광범위하였다. 영림공사가 수행할 업무 범위가 넓어지게 됨에 따라 산림청의 기본 사무와 중복성 발생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조림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장기저리의 융자금을 지원하는 산림개발기금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산림개발을 위하여 절실하게 필요한 경우에는 임산물을 대량으로 벌채, 이용, 판매하는 자에게 스스로 조림을 하거나6) 영림공사로부터 조림증서를 인수할 것을 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위치, 면적, 개발 능력으로 보아 산주 또는 대집행자에 의한 개발이 부적당한 산림을 국가 또는 영림공사가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산림청은 법과 예산이 마련되자, 영림공사 설립을 서둘렀다. 구체적으로 1973년 2월 15일 영림공사가 발족된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1973년 2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충남-북 연두순시에서 산림녹화를 강조하면서 영림공사의 임무를 부정하는 지시사항을 내렸다.7) 이 기사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산림녹화가 이루어지려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농민이 당장 조림에 참여할 수 있는 수익성 있는 수종을 심어야 하고 영림공사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산림개발법」에서 임무로 규정한 장기 용재림 조성이 아니라 농민들의 소득 증대를 뒷받침할 수종을 개발하고 양묘 사업과 지도 사업을 주요 업무로 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1년 가까이 논의하여 결정한 영림공사의 설립 목적을 일거에 부정하는 지시였다. 비상시국에서 대통령이 영림공사의 역할을 일반 재벌이 수행해야 할 업무로 바라보고 영림공사 직원을 월급이나 타 먹는 사람8) 으로 규정함으로써 영림공사의 설립 근거는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1973년 2월 23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산림청을 농림부에서 내무부로 이관하는 「정부조직법중 개정법률공포(안)」과 함께 「산림개발법중 개정법률공포(안)」이 가결되었다. 그 내용은 “앞으로 설립할 예정이던 영림공사를 설립하지 아니하고 동공사 출자금으로 73년도 정부 예산에 계상한 5억원을 전액 산림사업에 투자함이 황폐된 산림을 급속히 복구하는 데 보다 효율적인 방책일 것이므로 이에 필요한 조처를 강구하기 위하여 이 법을 개정하려는 것”이라는 김보현 농림부장관의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National Archives of Korea, 1973). 김종필 국무총리가 주재한 비상국무회의에서 해당 법률은 이의 없이 통과되어, 3월 5일 공포되었다. 결국 산림개발의 이행 주체로 설정한 영림공사는 간판을 내걸기 직전에 폐지되었고 그 빈 자리는 산림계와 내무부 행정력의 몫이 되었다.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과 제1차 계획 수립 과정은 이미 선행 연구(Kim, 1999; Kim, 2007; Bae, 2007)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이 절에서는 영림공사의 폐지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의 관련성만을 다룬다.
1972년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 즉 유신 선언과 12월 27일 유신헌법의 공포였다. 정책형성의 핵심 주체인 국회의 역할은 사라지고 비상국무회의에서 법이 만들어지고 정책이 결정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1973년은 유신 원년으로 특별했다. 유신 선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단기간에 산림녹화를 완성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2시간 17분이나 계속된 연두기자회견에서 10월 유신이 지향하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1980년대의 부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경제적으로 100억 불 수출, 1인당 1,000불 소득이라는 경제적 목표뿐만 아니라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전 국토를 녹화하고 아름답고 살기 좋은 국토를 만들겠다는 목표도 제시하였다(Oh, 2010). 유신 체제 아래에서 산림녹화는 10년 내 꼭 달성해야 할 유신 과업이 되었다.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 이후 산림정책과 관련한 일정을 보면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은 대통령이 치밀하게 계획한 결정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월 15일 강봉수 산림청장을 경질하고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손수익을 산림청장으로 임명하였다. 대통령이 유신 과업을 이행할 신뢰할 만한 정책집행자이자 산림청의 강력한 정책결정자로 손수익을 선택한 것이다. 대통령이 1월 16일 농림부 업무보고가 아닌 1월 22일 내무부 업무보고에서 산림청의 정책 집행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Kim, 2007) 역시 대통령이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을 이미 결정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후 2월 13일 충청남⋅북도 도정 업무보고 시 대통령은 김현옥 내무부 장관과 손수익 산림청장을 차로 불러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을 직접 지시하였다(Kim, 2007). 산림청장의 국무총리 보고 이후 2월 23일 비상국무회의에서 농림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과 영림공사 폐지가 동시에 결정되었다.
대통령은 결국 단기간에 산림녹화 완성이라는 유신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성과를 창출하는 데 시간적 제약이 큰 영림공사 대신 강력한 내무부의 행정력을 선택하였다. Ha(2010)는 농림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을 “박정희 대통령의 경직적 인식 체계에서 비롯되는 물리적 억압력 의존 선호의 발로”로 평가하고 있다. 10년 내 100만 ha 조림 계획을 담고 있는 제1차 계획이 유신 체제의 중점사업이 됨에 따라 산림청장은 비상국무회의나 새마을 국무회의에 수시로 배석하는 기회를 얻게 되어 사업 추진에 필요한 인력 충원, 예산 문제 등 관계 부처와의 협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매틀랜드의 정책 집행의 모호성-갈등 행렬 모형을 이용하여 박정희 정부의 영림공사 폐지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을 고찰한다. 산림개발법의 제정과 영림공사의 설립, 농림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과 제1차 계획의 정책 목표는 비교적 뚜렷하기에 정책의 모호성이 큰 실험적 정책 집행과 상징적 정책 집행 유형은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산림개발법」을 제정하고 영림공사를 설립하는 정책은 “산림개발의 획기적인 계기를 조성하여 임산자원의 비약적인 증강을 도모”한다는 정책 목표에 다소 모호성이 존재했다. 또한, 이를 집행하는 영림공사 설립이라는 정책 수단을 두고도 산주의 재산권 침해라는 위헌 소지와 막대한 정부 재정 투입으로 인해 산림청과 다른 부처 간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집행 유형이었다. 반면 산림정책을 더욱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농림부 산림청을 행정력과 경찰력을 보유한 내무부로 이관하고 산림녹화를 위해 100만 ha 조림이라는 정량적 목표를 설정한 제1차 계획은 정책 목표의 모호성을 제거하였다. 또한, 정책 수단을 상대적으로 갈등의 소지가 적은 내무부 행정력에 집중하고 영림공사를 폐지함으로써 막대한 재정 투입을 반대하는 경제부처와 갈등을 줄이는 행정적 집행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영림공사의 폐지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 과정은 정책 목표의 모호성을 줄이고 정책 수단을 둘러싼 갈등을 낮추기 위해 정치적 집행 과정을 행정적 집행 과정으로 전환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책 집행이 행정적 집행으로 전환하게 되자, 집행 결과를 결정하는 핵심 원리는 ‘행정력’이라는 자원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내무부의 행정력을 신뢰했고, 행정력을 더 많이 투입할수록 산림녹화의 성공 가능성은 높아졌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부는 왜 이러한 정책 전환을 하게 되었을까? 1972년 1년 가까이 대통령 자신이 포함된 논의 과정에서 결정된 내용을 왜 번복하게 되었을까?
가장 중요한 전환 요인은 유신 선언이라는 정치적 변동이다. 1972년 12월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영구집권의 토대를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단기간에 괄목할 만한 산림녹화 성과를 국민에게 보여주어 유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유신 원년인 1973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국민에게 제시한 1980년대 미래의 국가 청사진 중 하나는 민둥산을 말끔히 녹화한 아름다운 국토였다. 국토녹화는 대통령이 가장 원하는 유신 과업이 되었다. 수출 100억 불, 1인당 국민소득 1,000불 달성처럼, 도전적인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단기간에 목표를 달성하는 성공 경험을 체화한 대통령(Oh, 2010)조차 영림공사 설립에 막대한 정부 재정을 투입하더라도 10년 내 산림녹화 달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런 정치적 변동 아래에서 선택할 수 있는 대통령의 대안은 산림개발의 주체인 영림공사를 폐지하고 강력한 내무부의 행정력을 바탕으로 전국의 마을 단위 산림계를 산림녹화의 주체로 삼아 10년 내 산림녹화를 효율적으로 완성하는 것이었다.
둘째, 정책 수단을 둘러싼 갈등이다. 산림개발법의 핵심은 사유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여 조림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산주의 경영권을 산주의 의사와 관계없이 영림공사로 이전하고 미래 발생할 수익을 분배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분명 산주의 재산권 침해라는 위헌의 소지가 있는 제도였다. 정부는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산림개발법을 제정하였으나, 사업을 추진하면서 산주와 갈등이 발생할 잠재성이 있었다.
셋째, 영림공사와 산림개발기금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정을 정부가 대기 어려웠던 재정 압박이다. 1972년 산림청 1년 예산(62.7억 원)의 6.4배에 가까운 영림공사 설립 비용과 산림개발기금은 재정 당국과 청와대 경제 관료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규모였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가 429억 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영림공사 설립과 산림개발기금에 드는 400억 원은 막대한 국가 재정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산림개발법」 제정 당시 산림개발기금의 규모를 영림공사의 정부 출자금과 같이 명확하게 적시하지 않고 “예산의 범위 안에서” 기금을 마련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또한, 1972년 12월 4일 확정된 정부 예산은 정부가 당초에 제출하였던 6,980억 원보다 386억 원이 감축된 6,594억 원으로 확정되었는데, 정부 스스로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초긴축예산”(The Bank of Korea, 1973)이라 할 정도였다. 이런 경제 여건 속에서 당장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영림공사 설립과 산림개발기금에 많은 재정을 투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넷째, 산림청과 영림공사의 업무 중복성이다. 1972년 행정개혁조사위원회는 영림공사의 신설로 중복기구인 산림청의 폐지를 건의하였고 “농림부는 존폐가 위태롭게 된 산림청의 존속을 위해 식량청 신설마저 마다하고 산림청 존속을 끝까지 고집”(The Chosun Ilbo, January 14, 1973)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영림공사의 업무는 단순히 특수개발지역의 사유림 경영에 한정되지 않고 국유림 경영 대행, 국내 임산물 생산, 가공, 처분에서 임산물 목재무역까지 담당할 수 있었다. 한정된 정부 예산을 고려할 때 산림청과 영림공사의 양립은 어려워졌다.
결국 대통령은 영림공사의 업무를 조정하여 산림청과 양립하기보다는 영림공사를 폐지하고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하여 정부의 행정력을 중심으로 산림녹화를 달성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 론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유신 체제 아래에서 산림개발의 주체인 영림공사 설립을 폐지하고 국토녹화라는 유신 과업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농림부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했다. 10년 내 헐벗은 산림을 완전히 녹화한다는 유신 과업의 시간적 제약은 산림녹화 주체로서의 영림공사 역할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더하여, 영림공사 설립과 산림개발기금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정적 압박, 산림청과 영림공사의 업무 중복성, 사유림의 소유권과 경영권의 강제 분리에 따른 재산권 침해라는 위헌 소지가 곁들여졌다. 그러나 재정적 압박, 업무 중복성, 재산권 침해는 1972년 내내 대통령이 포함된 「산림개발법」 제정 논의 과정에서도 다루어진 사안이었다. 결국 유신 체제라는 강력한 정치적 변동이 원인이 되어 영림공사 설립을 결정한 대통령 자신이 영림공사의 폐지와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이라는 정책 전환을 이끌었다. 법을 개정하는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데 대통령의 지시부터 비상국무회의 결정까지 걸린 시간은 열흘이었다.
1973년 산림정책 전환 이후 대한민국은 산림녹화에 성공하여 민둥산은 사라졌고 산림자원은 놀랍게 성장했다. 한 예로, 1971년 대비 2024년 평균 임목축적은 17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그동안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는 더욱 고착되었고,9) 국민경제에서 임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산림녹화 주체인 산림계는 산림경영 주체로 성장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산림녹화는 성공했으나 임업은 없다’라는 현실에 직면했다. 영림공사가 사유림 경영을 활성화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는데 폐지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Park, 1997)10)도, 한정된 국가 재정을 고려할 때 영림공사 폐지는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산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고 영림공사라는 전문 경영조직을 신설하려 했던 혁신적 시도는 좌절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를 극복하고 임업을 활성화하여 국민경제에 기여하려 한다면, 1970년대에 직면했던 산림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대한민국의 산림관리 목표는 산림의 다양한 기능을 증진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임업의 발전을 도모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산림기본법 제1조). 후자와 관련하여 임업으로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려면 영세한 사유림 소유구조를 개선하고 임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구체적 방안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1970년 초반 산림개발 주체로서의 영림공사 모형은 ①산림의 소유권과 상관없이 산림을 공동 경영하는 규모화 방안, ②실효성 있는 사유림 경영권의 자발적 위탁 방안 개발, ③전문 산림경영 조직의 신설 또는 육성 방안의 개발이라는 과제를 제시한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다는 측면에서 소유권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고 1970년대와 달리 현재 사유림 경영권의 강제 분리는 불가능하며, 임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기업적 관점을 지닌 전문 산림경영 조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